돌고래의 評生

Big Fish [빅 피쉬] (2003) 본문

영상評

Big Fish [빅 피쉬] (2003)

DolpHin Kim 2013. 10. 13. 01:31

· 감독 : Tim Burton



· 키워드 : 문제 의식, 역계급적 지지, 비판적 사고, 성공만능주의


· 돌고래의 한 마디 : 옛 글을 다시 읽으며 나를 환기시킨다.


· 별점 : ★★★★


· 돌고래가 말한다 :


 아래의 영화 평은 대학교 1학년 글쓰기 수업 시간에 쓴 영화 평으로, 문제 의식을 갖고 영화를 바라보는 측면에서 적어본 것이다. 지난 글을 다시 읽는 겸, 빈약한 영화 평 코너를 채울 겸해서 올려본다. 딱히 전체적인 영화는 그다지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고 그럭저럭 재미있으면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흘러간다. 그런 덜 진중한 장면들 속에서 내 나름 문제점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이 글을 보며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나마 끄집어낼 수 있었던 사고를 지금은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좀 더 날카로운 눈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 꼭 ◯◯◯◯여야 하는가.

 

 ‘오피니언 리더’, ‘개척자’ 등등. 세계화와 더불어 무한경쟁 시대에 다다른 지금 자주 볼 수 있는 말들이다. 남 보다 더 먼저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어 그 분야의 최고가 되어 이른바 ‘성공한 인간’이 되기를 촉구하는 말들이기도 하다. ‘성공한 인간’을 찬양하며 지향점으로 삼는 여론 이면에는 ‘성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종종 ‘성공한 인간’의 모든 행적을 미화하는 우를 범하는 실마리가 된다. 한편 미화된 내용을 다수에게 제시하며 무의식 속에 사고를 주입시키곤 하는데, ‘성공=행복’, ‘성공=정당’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킨다.


 영화 ‘빅 피쉬’는 ‘사고 주입’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는 ‘에드워드 블룸’이라는 야망 넘치는 남자를 내세워 그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그의 일대기를 보며 관객은 ‘암묵적 동의’와 ‘동조’의 과정을 거치며 ‘영화에 내재된 사고’를 ‘내면화’한다. 마침내는 그를 변호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면,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빼앗을 때에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라는 격언을 곱씹으며 동조한다. “나쁜 놈이네.”라는 비판에는 “허접한 약혼자보단 훨씬 낫지.”라며 변호한다. 또 다른 예는 은행의 강도짓을 할 때이다. 강도의 과정이 엉성해 보이기 때문에 관객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까짓것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정도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도주하는 장면에서 경제에 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그의 박식함에 매료된다. 황폐화된 스펙터 마을을 복구하는 신에서 에드워드는 ‘도덕성 세탁’을 통해 다시금 관객들에게 변론거리를 제공한다.


 화려하고 동화 같은 장면들과 심각함이 결여된 사건들의 제시를 통해 영화는 치밀하게 관객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꿈같고 허황된 것 같은 달콤한 이야기는 관객들의 경계심을 낮추고 시나브로 ‘에드워드 블룸’의 편으로 만든다. ‘에드워드의 편’에 속하게 하는 것이 맹점인데, ‘에드워드의 편’인 그들이 자신들을 ‘에드워드 류의 인간’인 것처럼 혹은 ‘그러한 인물의 최측근’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사실 ‘에드워드 류의 인간’은 세상에 많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이 ‘성공한 인간’으로 추앙받고 ‘롤모델’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들을 따라 성공하고자 노력하는 것 역시 나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찬양하며 ‘그들의 편’에 선 채 ‘그들의 부정’에 둔감해지는 것이 궁극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역계급적 지지’일 수 있는데, 부정의 피해자가 ‘자신’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한다. 영화에서도 약혼녀를 빼앗긴 역할, 강도를 당한 역할 모두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피해자를 ‘타자화’한 채 자신은 ‘에드워드의 편’에서 사건을 미화하여 해석하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의 주입’에 의하여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어 자신을 배반하는 선택을 하는 경우는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현실에서 ‘사고’를 주입하는 주체는 주로 주류 언론이다. 가령 모 기업의 직원들이 파업을 했다고 치자. 이 때 대부분 ‘노동자’ 신분인 소시민들마저도 같은 ‘노동자’ 처지의 파업 직원들을 지지하기보다 ‘기업의 입장’에서 그들을 훈계한다. 기업이 무슨 부정을 저질렀을 지에는 둔감한 채 자신들이 파업을 해야 될 상황이 올 수 있음을 간과하며 기업의 편에 선다. 주류 언론에선 ‘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제시하고 ‘파업 혹은 시위 과정에서의 폭력성’을 집중 조명한다. 사회적 분위기 역시 ‘성공한 인간’을 지지하는 분위기이다. 둘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우리나라의 경제 주축인 기업에게 피해를 끼치며 땡깡 부리는 못된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이미지를 살포한다. 대중은 그러한 이미지를 ‘내면화’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한다.


 영화가 암시적으로 깔고 있는 ‘사고’가 주입되는 정도는 물론 현실의 언론에 비하면 낮을 것이다. 그렇기에 위에 제시된 현실의 가설을 접할 때엔 ‘확대 해석’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 역시도 현실의 언론과 상응하는 힘을 지닌다. 그 힘이란 ‘상업성’에 근거한 ‘재미’인데 아무런 거부감 없이 흡수를 할 수 있게 한다. 언론은 그에 비해 딱딱하고 거리감이 있다. 그래서 사고가 주입되는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의 거부반응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하지만 영화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화려하고도 신비로운 영상으로 꾸며내어 은연중에 사고를 주입한다. 자연스레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사고는 안착하여 시각을 가둘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감독의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감독 자신의 사고가 관객들에게 전달, 주입되는 과정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사고를 바탕으로 할 것이며 어떤 의도로 영화를 구성하고 연출할 것인지는 모두 감독의 재량에 달려있을 뿐이다. 영화에 내재된 사고가 비판받을 수는 있어도 ‘틀릴’ 수는 없기에 어떤 도덕적 책임을 지우기에도 모호한 면이 없잖다.


 결국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몫이 달려있다. 영화의 바탕이 되는 어떤 사고 묶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사고를 지닌 채 영화를 읽어야 한다. 어떤 영화를 보든지 간에 영화 속 치밀하게 구성된 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이 비판적 시각은 영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회에서 만연한 ‘성공=행복=정당’이란 ‘프레임’ 자체를 깨야한다. 사회가 각 개인에게 주입한 사고를 벗어나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지, ‘행복’은 어떤 가치인지 스스로 고민하여야 사회 속 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실천의 일환으로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릴 수 있다. ‘꼭 에드워드여야 하는가. 그래야만 행복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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